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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를 살아간 최초 우주인, 영화 <퍼스트 맨>시네마 리뷰 2023. 2. 24. 09:54
각본: 조쉬 싱어, 제임스 R. 한센
감독: 데이미언 셔젤
1969년 7월 20일, 미국은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계속 뒤처지다가 역전을 위해 최고 난이도인 달 탐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결국 성공한다. 인류 최초로 달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 바로 ‘닐 암스트롱’ 이야기를 영화 <퍼스트 맨>은 다룬다.
영화는 닐 암스트롱이 실제 달에 내렸을 때 말한 ‘인류의 위대한 도약’을 묘사한 미국식 영웅주의 드라마가 아니며, 인류 최초라는 수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도 관심이 없다. 달에 다녀오기까지 과정에서 겪은 인간 닐의 고뇌와 내면을 덤덤하게 응시한다.
영화가 비추는 그의 내면이 주는 인상은 일면 단단해 보이기도 하나 위태롭기도 하다.
닐이 가진 침착한 위기 대처 능력을 첫 씬으로 보여준다. 대기권 밖으로 나간 비행기가 통제를 잃고 대기권 밖으로 튕겨 나갈 순간에도 닐은 정신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여 무사히 귀환하는 데 성공한다.
(출처: 다음 영화) 통제력을 잃고 급강하는 비행체는 비행사인 닐에게 다가올 시련을 암시라도 한 듯, 그 이후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소중한 어린 딸 캐런과 이생에서 이별을 영화는 이어서 보여준다.
영화 <퍼스트 맨>은 이런 식의 반복, 그러니까 닐의 우주비행사로서의 뛰어난 침착함과 대처 능력을 보여주고 이어서 상실의 시련과 상처가 다가오고, 다시 위급한 비행 사태 속에서 닐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을 반복한다.
연달아 닥쳐오는 상실 고통 속에서 더 단단해져 가는 닐의 내면을 그린 전형적인 성숙의 과정처럼 보이나, 작가와 감독은 ‘그건 아니야’라며 선을 긋는다.
이러한 전형성 탈피가 영화 <퍼스트 맨>이 밟은 다른 지점이라 생각한다.
그 선을 긋는 방법을 감독은 상당 부분 닐 암스트롱 역할을 한 배우 라이언 고슬링 연기에 의지하고 있다.
(출처: 다음 영화) 닐은 자신이 가진 위기 대처 능력이 남다른 것을 알고 있고 자신감도 가지고 있다. 첫 씬에서 급강하는 비행체를 안전하게 착륙시킨 그는 원래 매뉴얼과 다른 비행으로 정직 먹는 거 아니냐는 농담조로 대화를 나누는데, 이는 자신의 실력을 믿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어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 후 닐을 지배하는 고통의 원천인 딸 캐런을 잃은 후부터는 주변에서 실제 그의 위기 대처 능력을 치켜세워도, NASA에 가게 됐어도, 제미니 8호와 심지어 아폴로 11호 선장을 맡았을 때에도 그는 전혀 기쁘지 않은 것처럼 몹시도 침착하다.
기쁨이 설 자리 조차 없게 된 것인가, 아니면 기쁨조차도 상실이 준 상처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게 된 것일까?
딸 캐런, 친한 동료 모두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닐을 찾아온다. 닐과 아내인 자넷(클레어 포이)은 이제 부고 소식을 들은 상대방 얼굴만 봐도 그것이 부고인지를 알 지경까지 된다. 남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닐의 집안 공기, 먼지 하나 조차 침잠하게 된다.
부고가 있는 후에 닐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천체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본다. 마치 사랑한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믿는 듯이 닐은 저 밤하늘 어딘가에서 빛나고 있을 딸 캐런과 동료들을 찾는다. 그때 닐의 모습은 마치 그들과 조우라도 한 듯 평온해 보인다.
그러기에 닐이 밤하늘 별을 보는 씬에서 나는 먹먹해질 수밖에 없어진다.
(출처: 다음 영화) 닐의 내면은 거칠고 굵직한 상실이 준 상처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단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상처를 품고 또 품을 뿐 그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할 수 있는 건 밤하늘 별 빛을 보며 그리운 사람을 찾는 것뿐.
그러기에 닐이 딸 캐런 이름이 새겨진 팔찌를 달에 놓고 오는 장면은 그가 온전히 상실의 상처에서 벗어 난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중한 딸 캐런을 기리기 위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한 것이다.
닐은 NASA 합류 테스트 면접에서 ‘달에 가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한다.
“단지 탐험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위치에 서면 새로운 점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달이란 새로운 위치에 서 있는 닐은 하지만 불행히도 현재 자신에서 새로운 무엇, 극복이나 성숙 같은 것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영원히 캐런과 먼저 간 동료들을 온전히 품을 수 있게 된 것 이외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극히 희박한 지구 무사 귀환 확률을 극복하고 닐은 돌아왔지만 여전히 변한 건 없다. 역시나 영화는 무사히 지구에 온 닐과 그의 팀들을 환영하고 스포트라이트 받는 장면에는 관심이 없다.
닐 역시도 인류 역사를 새로 쓴 장본인임에도 마음껏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해 보인다. 닐은 감염 검사를 이유로 격리된 채 일상을 보내다가 얼마 후,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아내 자넷과 마주한다.
둘은 처음엔 서로 눈을 마주치도 못하며 표정도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 큰 일을 성취하고 난 이후 오는 공허함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그 불안은 달에 다녀왔다고 내 곁에 없는 딸과 동료들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라는 현실 인식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다시 그 둘은 상실의 공기가 감싸는 현실 공간으로 돌아와 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 딸 캐런이, 같이 웃고 밥을 먹던 이웃이자 동료들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기에 처음에 그 둘이 만났을 때 ‘아 이제 어쩌지’하는 심정으로 어색해한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기에 결국 닐과 자넷은 서로의 손가락을 마주하며 그 일상의 고통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출처: 다음 영화)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자되고 더 이상 소련에게 밀릴 수 없는 그래서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그것도 인류 역사의 한 획을 긋는 달 착륙 프로젝트, 그 부담감은 감히 상상조차 못 할 것인데 여기에 상실의 상처까지 감내해야 한 닐 암스트롱. 그의 내면과 심리를 과장되지 않고 절제된 표현과 대사로 상실의 감정을 충분히 살려서 영화로 완성된 <퍼스트 맨>은 감독의 전작과는 다른 결을 보여주고 있다.
<위플래쉬>, <라라랜드> 음악이 소재이기 때문일 테지만 이야기의 힘 보다는 강렬하고 화려한 이미지와 사운드로 영화를 구성한 반면, <퍼스트 맨> 역시 실화와 원작을 바탕으로 하였고, 결론을 대다수 관객이 알고 있기에 이야기 힘이 크지는 않았음에도, 닐의 내면을 극화하지 않고 건조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이 경우 자칫 지루해지기 쉽기에 영화는 우주비행 훈련 모습과 과정을 상당한 완성도로 보여주어 관객들이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닐이 아폴로 11호 선장이 된 주요 계기인 제미니 8호 테스트 도중에 벌어진 균형을 잃고 회전하는 상황 장면에서는 현기증이 났다.
실감 나는 우주 비행 장면으로 인해 영화 <그래비티(2013)>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그건 잠시 그때뿐이다. 물론 <그래비티> 주인공 라이언(산드라 블록) 역시 딸을 잃은 상실의 고통을 안고 있지만, 우주 미야가 된 상황에서도 딸이 잃어버린 빨간 구두를 찾기 위해 지구 귀환에 성공한 ‘회복’의 이야기이자, 촬영과 구성 면에서 좀 더 영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퍼스트 맨> 후반으로 갈수록 2006년 손예진, 감우성 주연의 드라마 <연애시대>와 영화 <와일드(2014, 장 마크 발레 감독)>가 더 많이 떠올려졌다.
1969년 닐이 달에 다녀온 해는 그가 39세였고 2012년 8월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43년을 더 살았다. 그 긴 시간 동안을 닐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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