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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 부도의 날>시네마 리뷰 2023. 2. 24. 10:00
각본: 엄성민
감독: 최국희
IMF란 국가 부도 사태를 이제야 다룬 영화가 나온 건 아쉽다. 아니 늦더라도 나와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2008년 9월 14일은 미국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 신청을 한 날로 본격적으로 글로벌 금융 위기의 파고가 높아진 날이다. 이 사태 원인을 캐는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잡(2011.5.19 개봉)> 제작은 아마 2010년에 들어갔을 것이다. 불과 금융 위기가 본격화된 2년 안에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고, 전 세계에 배급되어 상영된 점과 비교하면 우린 늦은 감이 있다.
그럼에도 아쉬운 건 이 영화가 당시 여러 상황을 최대한 담으려 하다 보니 산만하다는 점이다. 97년 IMF 구제금융을 신청 한 날, 영화 속 재정국 차관(조우진)이 원하던 대한민국 경제 구도 Reset 버튼을 누른 그 날까지의 과정을 영화는 세 개 플롯으로 구성하여 말한다. 이 보다는 국가 부도 징후를 처음 발견한 한국은행 한시현(김혜수)의 고군분투에 더 힘을 쏟았더라면 좋았을 거 같다.
<국가 부도의 날>은 두 개 지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는 IMF가 아닌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김혜수 배우 역할인 한시현 대사) 미국 유학파이자 하버드 동문들로 구성된 경제관료들이 밀어 붙였다는 것(특히 IMF와의 비공개 회담 시퀀스), 둘 째로는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위기 징조가 보이고 있으니 관객 여러분, 더 넓게는 국민 여러분, 항상 의심하시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는 관객을 설득하려는 목적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 번째 강조 지점에서 더 설득력 있게 나갔어야 했다. IMF 겪은 이들은 다 아는 외환보유고 부족 이외 현재 경제 징후가 위기인지를 관객 각자가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을 좀 더 자세히 알려줬어야 한다. 그래야 누구의 어떤 말을 의심하고 깨어있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무엇을 알고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영화 <빅 쇼트>는 금융 위기의 원인인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 부실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꽤나 공을 들인다. 어려운 금융 용어도 이해하기 쉽게 여러 다른 비유(보드 게임, 고급 레스토랑 해산물 수프 등)를 들어준다. <인사이드 잡>에서는 전문가 인터뷰는 물론 이해를 위해 그림을 그려주고, 주요 수치를 그래프로도 보여준다.
<국가 부도의 날>은 위기 대처 능력이 부족했던 당시 정부의 무능과 비윤리적 행동, 남성 중심의 젠더 감수성 제로인 경제관료들, 미국 정부와 결탁한 IMF의 검은 속내, 여러 번 반복되는 당시 경제 위기 보도 뉴스 화면들 그리고 (배려 없는 단지 위기만을 부각하려는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지 않은) 부도난 기업이 생기면 화이트보드 위에 적힌 그 기업에 빨간 줄을 긋는 장면(의 반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들 장면은 주로 '분노' 감정을 유발하게 작동한다. 하지만 반복 장면이 많아서 유발하고자 한 '분노'감정은 '지루함'으로 희석된다
(출처: 다음 영화) 또 다른 플롯인 중소기업 사장인 갑수(허준호) 이야기는 당시 경제적 고통과 안타까움을 유발하며, 고려종금 직원 윤정학(유아인) 이야기는 차갑고 날카로운 자본주의와 금융시장과 금융인의 윤리를 지적한다.
잠깐 윤정학 플롯 설정을 보자면, 영화 <빅 쇼트> 주요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 부분이 1997년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발생할 수 없는 설정이란 점이다. 윤정학이 환율 폭등을 예상하고 달러에 투자한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빅 쇼트>에서 가져온 앞으로 대한민국 주가가 하락하고 금리가 치솟을 거라는 금융상품 거래이다.
이는 IMF 이후 (영화 속 6가지 조건 중이기도 한) 외국 자본의 국내에 직접투자 지분을 늘리고, 금융회사를 운영할 수 있게 된 자본시장법이 만들어지고도 한 참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차가움과 비윤리적 문제를 지적은 하지만 비현실적이어서 작위적이게 느껴진다. 여기에 사회문제를 다룬 고발성 영화라면 응당 열심히 해야 할 검증과 팩트 체크, 디테일에 소홀했다.
이 세 가지 플롯에 영화 시간 대부분을 할애한 후 남는 건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희석되기도 한 그러다 뒤죽박죽 된 감정뿐이다. 우린 아직 IMF에서 무얼 배워야 하는지 모른다. 이성적, 논리적으로 무엇을 봐야 하고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런 상태에서 영화는 '20년 후'라는 자막과 함께 지금을 비춘다.분명 '20년 후' 이후인 현재 모습이 이 영화가 가장 강조하고 싶고, 말하고 싶은 부분일 것이다.
<국가 부도의 날>이 IMF 사태가 벌어진 그 과정을 그리려 했다면, 지금으로 돌아와서는 아니 돌아왔다고 해도 영화에서처럼 '위기는 반복된다'라는 다들 뻔히 아는 주장에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냥 막무가내 식으로 윤정학(유아인) 대사인 '난 절대 안 속아. 니들 말 믿을 거 같아?!'를 반복하고, 가계부채 폭탄 초읽기 같은 보고서를 한국은행 후배가 한시현(김혜수)에게 주며 도와달라고 하고, 한시현은 "우린 팀으로 움직이는데" 하고 끝나버려서는 안 된다. 한시현 표정은 자신감에 차 있고, 그 말을 들은 후배는 안심을 하는 그 씬은 국가 경제를 걱정하는 진정성 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한시현이 지금의 국가 경제가 왜 위기이고 IMF 당시 배운 점을 토대로 대처 방안이 담긴 보고서를 만들어서 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출처: 다음 영화) 그다음 엔딩씬인 강남 테헤란로 일대를 시작으로 서울 전경으로 보여주며 '깨어있으라'는 주문은 그래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뿐이다.
반복되고 영화 끝에도 나온 윤정학 말로 인해 정부가 하는 말은 다 의심하는 반정부적이고,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각자도생을 주장하는 것처럼 들린다. 거기에 국가 위기를 기회로 돈을 벌고 권력을 가지게 된 자들의 건재한 모습, 이와 상반되게 중소 제조기업 사장인 갑수는 결국 버텨냈으나 아직도 여전히 공장 기계를 돌리며 외국인 노동자에게 호통치는 모습에서 '결국 그 큰 희생을 치르고도 우린 여전히 바뀐 게 없는 건가, 안 되는 건가' 같은 패배감마저 든다.역사 이래 가장 큰 위기인 IMF 사태 당시를 고발하듯 다루기로 했다면 그 원인과 실상을 보여줬어야 했다. 이렇게 감정 유발로 그칠게 아니다. 거시경제, 금융 시스템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 시스템과 (역시나) 정치 헤게모니도 알아야 하는 등 그 업에 있는 사람조차도 그 작동 원리와 파급성을 모두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빅 쇼트> 속에서 '위기는 반복된다'는 대사, 자막은 그 어디에도 없다. 엔딩 씬에 블룸버그 기사를 인용한 'CDO(주: 금융위기 도화선이 된 금융 파생상품 이름)'와 유사한 상품인 'bespoke tranche opportunity'을 2015년도부터 대량 판매하기 시작했다'란 자막으로 대신할 뿐이다. 영화를 다 본 관객이라면 대부분이 그 의미가 결국 위기가 다시 오고 있다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다 본 후, CDO와 유사 상품이 뭔지 구글에서 찾아봤더니 정말 많이 검색이 되었고, 그중 경제기사, 논문, 보고서도 꽤 있었다.
<국가부도의 날> 본 후 난 뭘 검색해 보고 싶은 게 없었다. 아니, 알 수 없었다. 그냥 그 시대를 지나온 한 사람으로 그때의 힘들고 지치고 무기력했던 시절만이 떠올려질 뿐이다. IMF는 거의 대다수 한국인은 알만큼 큰 이슈였고, 그 이전 한 번도 영화한 소재가 아니란 이유로 너무 쉽게 선택하고 가볍게 소비된 것 같아 씁쓸하다. 다시 한시현 대사 "고민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 굵직한 현대사를 다루기로 했다면 그냥 오락성 상업영화로,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관객수만을 염두에 둬서는 안 된다. 왜냐면, 영화라는 매체는 성격과 파급은 블로그나 개인 유튜브 방송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1987>, <택시운전사> 이후 당시 상황 관련 기사와 다큐 등이 조명을 받았다. 1020 세대들도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국가부도의 날> 검색하면 '사실은 한국은행이 먼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자고 했다' '한국은행에서는 단체관람을 한다 등의 기사가 상단에 자리한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고증을 철저히 하지 않아 이런 이슈를 만든 점도 문제이나 현재 경제 상황을 생각할 때 꽤 시기적절한 영화인데.
그럼에도 IMF 경제위기를 정면에서 다루어 이제 후배 영화가 나올 수 있는 물꼬를 터 준 점에서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은 분명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현대 경제사를 다룬 보다 진중하고 시사점을 가지고 생각할 방향을 주장하는 후배 영화들이 계속 만들어지길 희망한다.
덧붙이는 글
영화 장면 중 마음에 든 건 바로 슬리퍼 장면이다.
극 초반 한국은행에서 한시현 팀장이 부도 위기 징후 보고서를 제출한 후 총장(권해효) 호출을 받고 뛰어가는 씬에서 카메라는 슬리퍼를 신고 뛰는 한시현의 발만을 비춘다. 슬리퍼는 긴박한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그녀가 보고서 작성 현장에서는 힐이 아닌 편한 슬리퍼를 신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보고서를 검토하는 데 집중했음을 알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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