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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인을 더 잘 바라보는 법. 영화 <스탠바이, 웬디>
    시네마 리뷰 2023. 2. 23. 17:25

    각본: 마이클 골람코(Michael Golamco)

    감독: 벤 르윈 (Ben Lewin)

     

     

    영화 <스탠바이, 웬디> 주인공 웬디(다코다 패닝)은 21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자폐를 앓고 있어 가족과 떨어져 요양병원에서 살고 있다. 웬디는 <스타트렉>시리즈에 몰입되어 웬만한 디테일, 조연급 배우의 딸 이름 정도는 1초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특히, 스팍 캐릭터(스팍은 인간과 벌칸 행성 외계인 간에 태어남)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고 극 중 외계인 언어를 구사할 정도다.

     

    <스타트렉>을 제작한 파라마운트 픽처스는 시즌 마지막 편 시나리오 공모전을 개최한다. 웬디는 알맞은 단어와 문장을 찾고 또 찾고 쓰고 또 써서 무려 420페이지가 넘는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그녀는 남에게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수준의 시나리오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작업하다가 우편 발송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흐른 걸 알게 된다.

    (출처: 다음 영화)

    <스탠바이, 웬디>의 본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공모 마감일이 불과 이틀밖에 남지 않자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던 웬디가 직접(반려견 피트와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떠나는 순탄치 않은 과정을 그린다.

    결론은 짐작했듯이 어렵게 어렵게 시나리오 제출에도 성공하고, 가족이라고는 하나뿐인 언니와 조카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물론 반려견 피트도 함께)

     

    언뜻 보면 LA로 가는 순탄치 않은 과정에서 웬디가 성장하고 자폐를 극복하는 로드무비로 보기 쉬운데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이 <스탠바이, 웬디>가 가진 장점이자 성취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리뷰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즉, 영화 처음과 끝에 서 있는 웬디는 크게 다르지 않다. 자폐를 가진 웬디가 LA로 가는 역경 끝에 자신을 극복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장애를 가지지 않은 자의 오만한 판단이다.

     

    극복이라고 할 만한 건 웬디가 상대의 눈을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고, 타인이 자신을 만지는 데에 조금은 덜 회피하게 되었다는 정도이지 웬디는 이미 자폐 증상 상당 부분을 극복한 그러니까 ‘스탠바이’가 된 상태였다(‘스탠바이’는 영화 속에서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데 흥분한 웬디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언니 집에 들어가서 너무나 보고 싶고 사랑스런 조카 루비를 돌봐줄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출처: 다음 영화)

    장애가 없는 사람들(나를 포함한)이 가진 편견과 왜곡을 관객이 직접 대면하게 하고 민낯을 보여 주지 않고 <스탠바이, 웬디>는 웬디가 소망하는 시나리오 접수를 성취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과정에서 마지막에 관객들이 ‘아! 아니구나!’하고 느끼게 해 준다. 무척이나 사랑스런 영화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웬디가 시나리오를 접수하는 여정에서 겪는 고초들은 기존 로드무비 속 그것들과 유사하나 웬디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데에 자신이 쓴 시나리오 대사에 기댄다는 점이 재밌고 귀엽다(돈과 아이팟을 도둑맞고, 버스에서 강제 퇴출당하고, 노숙을 하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지칠 대로 지친 웬디는 자신이 쓴 스팍 대사 “논리적으로 볼 때, 지금 해야 할 일은 ‘전진’입니다”를 떠올리며 다시 길을 나선다).

     

    영화 백미는 클라이막스인 파라마운트에 도착한 웬디가 시나리오 제출에 제동이 걸리자 꾀를 내어 결국 성공하는 씬에 있지 않다. (그 꾀도 영화 <세 얼간이> 속 시험지 제출 씬을 차용하고 있다)

     

    진정한 백미는 따로 있다. 바로 웬디가 경찰관과 외계어인 클리온 언어로 대화하는 시퀀스이다. 웬디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시간이 촉박한 웬디는 병원 탈출에 성공하나 실종 신고 상태여서 금방 경찰 눈에 띄고 만다. 경찰이 다가오자 웬디는 반사적으로 도망쳐 막다른 길에서 숨는다. 잔뜩 겁먹은 채로 숨은 웬디에게 경찰은 마구잡이로 다가가지 않고 호흡을 고른다.

     

    경찰은 웬디에게 외계언어인 클리온 언어로 “우린 친구야. 이리 나오렴”이라고 말한다. 그 경찰은 도망치던 웬디 백팩에 달린 스타트렉 스티커를 본 것이다. 아마도 스타트렉 덕후 정도 돼야 손에 쥘 수 있는 그런 스티커였을 것이다. 덕후를 단번에 알아보는 건 덕후만이 할 수 있다. 

     

    경찰서로 간 웬디는 자기를 찾아 나선 병원 원장과 언니를 만나지만 다시 파라마운트로 향한다. 스타트렉 덕후 경찰은 조심스레 떠나는 웬디 어깨에 손을 얹으며 클리온 언어로 “카플라 웬디(승리하길 웬디)”라고 하자, 웬디는 원장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경찰의 눈을 보며 어깨에 손을 얹고는 대답한다. “카플라 프랭크, 야쉬”

    (출처: 다음 영화)

    스탠바이 된 웬디는 단지 행동이 서툴고 미숙할 뿐이지 조카를 돌보고 자기 앞가림을 할 능력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고 저금도 하며, 병원에서 혼자 힘으로 탈출하고 돈이 없어 버스표를 못 사도 버스 짐칸에 몸을 구겨 넣어서라도 LA에 도착한 지능, 순발력, 의지, 독립심을 고루 갖추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은 건 <스텐바이, 웬디>는 웬디가 자폐를 이겨 내는 과정을 그리지 않는다. 

    이미 '스탠바이'된 자신을 입증하고 또 원하는 바를 스스로 힘으로 성취하는 과정을 그린 따듯하고 귀여우면서도 사랑스런 이야기다. 

    (출처: 다음 영화)

    웬디처럼 우직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혼돈과 역경 속에서도 헤쳐나가는 캐릭터와 영화를 사랑한다.

    그 하고 싶은 일은 어쩌면 대다수 눈에는 별거 아닐 수도 있고,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들은 주변의 반대와 따가운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한다. 영화 <머니볼> 주인공 빌리는 말한다. “우리의 방식을 굳이 남들에게 설명하려고 하지마”

    이런 톤의 영화는 <머니볼>, <인사이드 르윈>, <행복한 사전>, <걷기왕>, <소공녀>가 지금 떠올려진다. 이들 영화들은 세 번 이상은 본거 같다. 이제 한 편을 더 추가하게 됐다.

     

    좋은 이야기를 읽고 보는 건 언제나 행복하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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