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수살인>과 <극비수사> 소신 있는 사람
각본: 곽경택, 김태균
감독: 김태균
형사 사건이 일어났으나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남겨졌다 하여 암수 범죄(hidden crime), 그 사건이 살인사건이어서 암수살인이라 하는데, 부산에서 실제 벌어진 암수살인이 영화의 배경이다.
영화 <암수살인>은 살인범은 강태오(주지훈)라고 알려주며 시작한다. 강태오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들이 증거 불충분으로 밝혀져 형량을 줄이는 전략을 세우고 여기에 김형민 형사(김윤석)을 끌어들인다.
이런 범인 전략도 금방 간파 되면서 이 둘의 두뇌 싸움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흥미를 돋게 만든다.
하지만 <암수살인>은 흥미진진한 두뇌 플레이 범죄 수사물에 멈춰서 있지 않다.
영화 속 암수살인을 파헤치는 김형민 형사는 주변에 만류에도, 이미 암수살인을 쫓다 패가망신한 선배 형사가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말하여도, 그러다 결국 파출소로 좌천이 되어도 결국 암수 살인 전말을 밝혀낸다.
법정에서 살인범 강태오가 저지른 범죄 입증이 불리해지고, 태오 입을 열기 위해 돈과 사제 용품을 넘긴 불법 행위까지 들통이 나 형사 지위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김형민 형사는 판사가 마지막 할 말 없냐고 묻자,
“지금 형기 마치고 나오면 강태오 나이 50대 입니다. 아직 힘이 남아 분명 또 살인을 저지를 것입니다. 저런 놈은 절대 사회로 나오면 안 됩니다!”
저 말만 떼어 놓고 보면 재판정에서 조금이라도 좋게 보이려고 한 말 같지만, 영화 내내 형사 김형민 태도와 행동은 오직 강태오가 말해 준 단서와 주변 탐색에만 집중한다. 그는 수사를 위해 마약단속반에서 스스로 강력계 형사과로 자리를 옮기고, 파출소에 근무하더라도 사건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 <암수살인>은 형사의 소신을 보여주는 영화다.
형사의 소신을 그린 또 다른 결이 상당히 비슷한 영화는 2015년에 개봉한 <극비수사>이다.

‘소신’은 실제 <극비수사>에서 공길용 형사(김윤석) 입을 통해 이 영화가 소신을 가진 형사 이야기임을 선언한다. 물론 소신은 공길용 형사 파트너인 역술인 김중산(유해진)도 만만치 않다.
증거와 논리를 기본으로 한 형사와 그와는 정반대에 있는 미신이라 여겨지는 ᅳ 그러나 동양 특히 한국 정서에서는 충분한 납득이 가는 ᅳ 역술, 점을 치는 역술인과의 소신이 시너지를 일으킨다. 그 소신은 범인 검거가 1순위가 아닌 유괴된 아이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1순위인 것이다.
<극비수사>와 <암수살인>은 실화가 바탕이기는 하나 참신하고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업에 책임감과 가치를 명확히 제시하며 남들이 알아주던 아니던 묵묵히 수행하는 모습을 좋은 배우가 담아낸 잘 만든 한국형 범죄 수사물 영화라 생각한다.
두 영화는 ‘형사의 소신’이란 것 이외에도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실제 사건을 그것도 모두 부산에서 일어난 유괴(극비수사)와 살인(암수살인) 사건을 다루며, 형사 역 모두 김윤석 배우이다.
주제가 유사하고 부산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했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두 영화 모두 각본이 ‘곽경택’이기 때문이다. <극비수사>에서는 각본, 감독을, <암수살인>에서는 각본과 총괄제작을 맡았다.
각본가이자 감독 곽경택 필모그래피를 보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3편이며 현재 진행 중인 ‘장사리 9.15(가제)’까지 포함하면 4편이나 된다. 이미 나온 3편 모두는 소신 있는 사람 이야기다. 첫 번째 작품은 2002년 개봉한 <챔피언>으로 프로복서 ‘김득구’ 선수의 일생을 그린다. 링 위에서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김득구 복서의 인생은 복싱 그 자체이다.
그다음 작품이 <극비수사>이고, 세 번째 작품이 <암수살인>인데, 조금 걱정되는 점도 있다.
‘소신’을 밀어붙이는 에너지, 절박함이 점점 약해진다고 느껴진다. <챔피언>에선 죽음이 코 앞에 온 걸 알고 있어도 다시 링 위에 서며, <극비수사>는 가족 생계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배신을 당했어도 다시 동일 유괴 사건을 맡기도 한다.
반면 <암수살인>에서 형사 김형민은 우선 범인 잡는 것이 재밌다고 말한다. 김형민 친형은 사업가로 경제적 도움도 받을 수 있어서 다른 영화 속 형사들보다 형편이 많이 나아 보이며(아무리 그래도 김형민 차가 제네시스란 설정은 잘 이해가 안 간다. 상당히 보수적인 경찰 조직에서 자신 상관보다 좋은 차를 가지고 다닌다는 건 좀…), 건사해야 할 가족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소신도 있는데 에너지까지 활활 타오르는 실화가 매우 희소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상상’이란 바닥을 딛고 있다. <암수살인> 김형민 캐릭터의 설정과 주변 조건을 좀 절박한 환경에 놓았었더라면 드라마적인 긴장이 좀 더 커졌을 텐데 아쉬운 부분이다.
배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김윤석. 그의 필모에서 형사 역할은 절대적이다. 영화 <범죄의 재구성>(2004년)부터 형사 역할을 시작한 김윤석 배우는 그 이후로 <추격자>, <거북이 달린다>, <극비수사>, <암수살인>까지 5편에 이른다. <범죄의 재구성>에서는 분량이 적은 조연이어서 뺀다면, 다른 4편에서의 전현직 형사 그것도 거친 강력계 형사 역할을 하였다. 거친 표정과 막무가내식 행동 등 강력계 형사가 주는 이미지 프레임에 갇혀 비슷비슷한 연기를 보여 주기 쉬운 역할이다. 하지만 김윤석 배우는 작품마다 각 캐릭터 성격이 다르게 들어나게끔 세밀하게 표현한다. 특히 <극비수사>와 <암수살인>에서 그런 면이 도드라진다.
형사적 직관과 능력을 보여주면서도 <극비수사>는 좀 더 순수하다고 할까? 그러면서도 영화 초반 속물적인 면도 보여주며 캐릭터를 풍부하게 한 반면, <암수살인>에서는 확신에서 온 노련미와 증거 추적에서의 섬세함을 잘 잡아낸다. 코너에 몰려도 언성을 쉽게 높이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 실수도 덤덤하게 인정한다. 영화 <세븐>에서 모건 프리먼이 맡은 소머셋 형사가 떠올려진다.
배우 주지훈 역시 범죄심리학자가 ‘판정 불가’로 내린 살인범을 디테일하게 표현해낸다. 표정, 말투, 눈빛, 걸음걸이, 앉은 자세, 글을 쓸 때 모습 등 작은 하나하나 세심한 신경을 기울인 모습이 보인다. 주지훈 필모에서 배역은 매우 다양하게 진행 중이다. 영화 <아수라>에서부터 연기를 잘한다고 느꼈는데 그 이후 배역의 스펙트럼이 넓어져도 연기력이 흔들리지 않은 걸 보면 분명 주목해야 할 배우임에 틀림없다.
‘소신’을 중심 바탕으로 하여 업의 특성상 정반대인 역술인과 형사의 케미를 그린 <극비수사>, 영화 초반부터 범인을 밝히고 그의 암수살인을 밝혀나가는 설정, 범인 강태오가 입었던 무스탕, 피해자 피임기구 등 참신한 소재로 반전을 이끌어 가는 재미까지 있던 <암수살인>.
이 두 작품이 가진 주제와 재미를 곽경택 감독의 다음 작품에서도 계속 이어지길 희망해 본다.